<라쇼몽(In The Woods) / 일본 / 시대극, 드라마, 스릴러, 범죄 미스테리 / 러닝타임 87분 /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 출연 모리 마사유키, 미후네 도시로, 쿄 마치코, 시무라 다카시 등 / 1950년작>

 

‘아홉수 소년 6회’에서 보여줬듯이 같은 경험을 해도 기억과 생각은 서로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영화 ‘라쇼몽’이 그렇다. ‘라쇼몽’은 관아에 붙잡혀온 도둑, 사무라이 남편과 함께 길을 가고 있던 아내, 무당에게 빙의되어 나타난 사무라이의 혼령이 차례로 증언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들이 본 것은 모두 같은 장면이지만 서로의 진술은 완전히 다르다.

 

 

이야기의 시작은 ‘라쇼몽’이란 현판이 걸린 대문 처마 아래에서 시작된다. 처마 아래 나무꾼과 스님이 앉아 있다. 그때 비를 피해 한 남자가 처마 밑으로 들어온다. 스님은 그들에게 기묘한 이야기 한 토막을 풀어놓는다. 숲 속에서 사무라이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피의자들이 저마다 자기가 살인범이라고 자백했다는 이야기다.

 

그럼 그들의 자백을 들어보자.

 

 

도둑(다조마루) : 저자를 죽인 건 분명 나다! 저 부부를 본 건 사흘 전, 무더운 오후였다.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데 사무라이와 그 아내가 길을 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때 갑자기 산들바람이 불어와 아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나부꼈다. 얼굴이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여자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가능한 한 남자를 죽이지 않고 여자를 차지할 작정이었다. 속임수를 써서 남자를 사로잡아 나무에 묶었다. 남편을 보자 여자가 단도를 꺼내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격렬한 여자는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남자를 살해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여자를 겁탈하고 나자 여자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죽든지, 남편이 죽든지 어느 한쪽은 죽어야 해요. 두 남자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선택은 하나뿐이에요. 둘 중 살아남은 사람을 따르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남편의 포박을 풀어주고 정정당당히 결투를 벌였고 그는 훌륭히 싸웠다. 내 칼을 23번이나 받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남자의 가슴에 일격을 꽂았다. 남자와 싸우는 사이 여자는 달아나 버렸다. 그 여자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남자의 칼은 팔아서 진탕 술을 먹었다. 여자의 단도는 비싸보였는데 깜빡 잊어버렸다. 사무라이를 죽인 사람은 바로 나다!

 

 

아내 : 도적에게 봉변을 당한 직후 도적은 나와 남편을 조롱하듯 큰 소리로 웃더니 사라져버렸다. 남편이 분노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지금도 그 눈빛이 생생하다. 슬픔이 아닌 차가운 증오의 눈빛이었다.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남편에게 단도를 내밀며 날 때리고 죽이라고 했다. 그래도 남편은 계속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하더니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남편의 가슴에 단도가 꽂혀 있었다. 너무 끔찍했다. 놀라서 숲속으로 달아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산 아래 강가에 서 있었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

 

 

사무라이 혼령 : 도적은 아내를 범한 후 곁에 앉아 그녀를 위로했다. 그자는 교활하게 아내를 설득했다. “한번 몸을 더럽힌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편에게 돌아가느니 내 아내가 되지 않겠나?” 아내는 황홀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때처럼 아내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 적이 없었다. 아내는 묶여 있는 내 앞에서 “어디든 좋아요. 날 데려가 주세요. 먼저 남편을 죽여주세요. 남편이 살아 있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라며 애걸복걸했다. 인간이 어찌 그토록 비열하고 저주스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 말을 듣자 도적조차 충격을 받았다. 그자가 아내를 넘어뜨리고 발로 밟은 채 내게 이 여자를 어찌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의 말 때문에 그를 용서했다. 아내가 일어나 도망치자 도적이 아내를 쫓아갔다. 시간이 흐른 후 도적이 혼자 돌아와 포박을 풀어주곤 가버렸다. 주위가 조용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울었을까? 나였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단도가 보였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단도로 자살했다.

 

용의선상에 오른 세 사람이 모두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바람에 사건은 도리어 오리무중에 빠져버렸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조용히 듣고 있던 나무꾼이 입을 연다. “그 남자 가슴에 단도는 꽂혀 있지 않았어! 그 남잔 장도에 찔려 죽었다! 산에서 여자 모자를 발견했다. 잠시 후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수풀 사이로 살짝 들여다보니 묶인 남자와 울고 있는 여자 그리고 다조마루가 보였다. 다조마루는 여자 앞에 꿇어앉아 아내가 되어 달라고 애원했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했다. 여자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며 단도로 남편을 풀어줬다. 다조마루는 남자들끼리 결정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편은 다조마루에게 이런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 않다며 원한다면 아내를 데려가라고 했다. 여자가 남편과 다조마루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조마루를 향해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도 다조마루는 혼자서 가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더니 남편과 다조마루가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기 시작했다. 아내의 부추김에 두 남자가 결투를 시작했고 마침내 다조마루의 칼에 남편이 죽었다. 다조마루가 여자를 데려가려고 하자 여자가 강하게 뿌리치곤 도망쳐버렸다. 결투로 인해 힘이 빠진 다조마루는 여자를 놓치자 죽은 남편의 칼을 챙겨 도망쳤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누가 범인일까? 목격자인 나무꾼의 이야기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사람들의 진술은 모두 거짓일까? 나무꾼은 왜 관아에서는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까? 영화는 누가 사무라이를 죽인 진범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각자가 기억하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결국 모두가 공유할만한 객관적인 사실은 이곳에 없다.

 

도적은 사무라이처럼 당당한 칼잡이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도적은 ‘정정당당히’라는 말에 방점을 꾹 찍는다. 도적은 “겁탈은 했고 남편도 죽였다. 하지만 정정당당한 싸움이었고, 위대한 나를 상대한 남편도 대단했다.”며 스스로를 호걸로 치켜세운다. 아내도 욕망이 있다. 존중받고 싶은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렇기에 자신을 끔찍하고 싸늘하게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을 견딜 수 없다. 게다가 아내는 자신을 피해자이자 가련한 희생자로 포장하려는 욕망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피해자인데 남편이 자신을 경멸했다. 사무라이의 아내로서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살시도까지 했다. 남편을 내가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식을 잃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무라이도 욕망이 있다. 그는 무사도에 입각한 사무라이라는 명예욕이 강하다. 남편은 자신의 치욕을 아내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당당함을 유지하려 한다. 그렇기에 “문제의 근원은 아내의 배신이며, 나는 사무라이답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명예를 지켰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예욕이 강한 사무라이다.

 

참 재밌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해버린다. 도적도 남편도 아내도 결국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 테다. 나무꾼도 단도를 훔친 것을 감추기 위해 진실을 감춘다. 누가 사무라이인 남편을 죽였는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왜곡하게 만드는 인간의 심리이다. 우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세계 안에서 해석된 사건으로 기억한다. '라쇼몽'의 인물들처럼 사람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기억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억과 생각은 완전치가 못하다.’ 누군가 “내가 정말 봤다니까! 그건 정말이야!”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진실일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역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답게 1950년작이지만 기법이 세련되었다.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나올만 하다. 기억의 왜곡에 대해 다룬 ‘라쇼몽’의 원작소설은 ‘덤불 속+라쇼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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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자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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